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이자 다양한 분야에서 다재다능했던 인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업적
미술, 과학, 해부학, 공학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천재성을 발휘했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우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주요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1. 생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나 14살쯤 일찍이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가 피렌체로 이사한 뒤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하였다. 그 후 20살이 되었을 때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작품의 조수로 참여하여 꼬마 천사 두 명을 담당하게 되었다. 베로키오는 그 작품을 보고 다빈치를 정식 화가 길드로 가입시키게 된다. 야사로는 베로키오가 당시 그 작품을 보고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붓을 꺾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 30살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지원을 받으며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 내며 유명세를 쌓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그 외의 작품들로는 <암굴의 성모>, <기마상> 등이 있다. 그 후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말년으로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자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예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프랑스 클로 뤼세의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독신이었기에 그가 자식처럼 제일 아끼던 프란세스코 멜지라는 제자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게 된다.
2. 작업
그의 작업은 미술뿐만이 아니라 해부학, 공학, 식물학, 역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름을 남겼다. 다 빈치는 다양한 방면에 호기심을 가진 것에 비해 실제로 남아있는 작품의 수가 적은 편인데, 이것은 본인의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던 탓에 다 빈치 작품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한 작품들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는 새로운 화법을 실험하는 것으로 그의 업적이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유화를 시도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 결과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 명작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그 외 <암굴의 성모>나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 등도 손꼽히는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가 서양사에 이토록 유명인으로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금기시 여겨지던 해부를 통하여 인체 해부학에 대해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태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이며, 많은 인체 해부 스케치를 남겼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란 스케치는 인체 비례의 바이블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완성작이 많은 화가인데 워낙 다양한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한 작품을 다 완성하지 않은 채 다른 그림을 시작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추측에 의하면 자신이 완벽히 알지 못하면 그리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인해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이해가 완벽해질 때까지 공부한 뒤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 속도 때문에 미완성작들이 많이 남은 것이 아닌지 추측한다.
3. 미켈란젤로와의 관계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보다 한창 연장자이나, 호승심 가득한 미켈란젤로의 성격상 레오나르도를 선배로 인식하지 않고 경쟁자로 취급하였다. 그에 비해 그들보다 어린 라파엘로는 그들을 롤모델로 삼아 존경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도 성격이 까칠하기로 유명하기에 이러한 미켈란젤로와 자주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추후 의도치 않게 미켈란젤로와 대결작을 그리게 되기도 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